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리스 내전 (문단 편집) == 영향 == 짧게는 3년, 길게는 6년간 치뤄진 내전으로 100,000~150,000명이 사망하고 최소 800,000명에서 1,000,000명의 그리스인이 [[난민]]으로 전락하는 대재앙이 일어났다. 이미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페허가 된 그리스는 이 내전으로 기둥 뿌리까지 파괴되어 버렸다. [[냉전]] 시대 군사 대립의 시작을 연 전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미군이 그리스군에 제공한 [[네이팜탄]]이 전장에서 사용되는 등 훗날의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연상하게 만드는 광경이 여럿 등장하기도 했다. 역사상 최초의 네이팜탄 사용이 이뤄진 전쟁이 그리스 내전이라고 알려지기도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사실이 아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오키나와 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이미 사용되었으며, 유럽 전선에서도 독일군 점령지역 폭격에 사용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제1세계]] 진영은 그리스 내전의 승리로 [[발칸 반도]] 전체의 공산화와 [[공산주의]] 세력의 [[지중해]] 진출을 막을 수 있었으며, [[제2세계]] 진영은 제1세계 국가인 [[튀르키예]]가 막고 있는 [[보스포루스 해협]] 대신 [[그리스]]와 [[아드리아해]]를 통해 [[지중해]]로 진출하려고 했으나 내전의 패배로 인해 지중해 진출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내전에서 승리한 그리스 정부는 종전 1년 후인 [[1950년]]에 [[6.25 전쟁]]이 벌어지자 [[유엔군사령부|UN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또 내전의 원흉 취급을 받게 된 그리스 공산당은 바로 불법화되었다. 이후 기존의 공산당 지지자들은 연합민주좌파를 지지하였고, 일부 전직 그리스 공산당원들도 참여하였다. 불법화 조치는 1974년에 [[그리스 군사정권|군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되면서 해제되었으며 [[그리스 공산당]]은 1974년 총선에서 연합좌파에 참여해서 5석의 의석을 얻고 원내정당이 되었다. 1981년에는 내전으로 그리스를 떠난 이들에게 사면령을 내리고 귀국을 허용하면서 아직 생존해 있었던 공산주의자들이 그리스로 귀국했다. 한편으로 내전은 그리스 북부에 살던 [[소수민족]]들에게 재앙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스 정부는 [[발칸 전쟁]]으로 차지한 그리스 북부를 자국민이 살고 있는 엄연한 자국 영토로 인식했지만 사실 그리스 북부는 그리스인뿐만 아니라 슬라브계 [[마케도니아인]]은 물론, [[알바니아인]], 아로마니아인[* [[루마니아인]]과 근연관계인 동로망스어군에 속한 소수민족으로 종교도 정교회임에도 발칸 지역에서 어느 나라에도 동화하지 않아 시달림을 받아 왔다. 2020년 기준으로 전체 인구가 300,000명 정도이며 그리스에 40,000명~100,000명이 거주하여 가장 많이 살고 있다.], [[포마크인]], [[튀르키예인]] 등 다른 민족들도 많이 거주했다. 전간기 그리스 정부는 소수민족에 대한 강제 동화를 시도했는데 이 때문에 소수민족들은 그리스 정부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 그래서 이들은 [[자결권|민족 자결]]을 주장한 그리스 공산당에 대거 가담했는데 특히 집중적인 박해 대상이었던 마케도니아인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가뜩이나 소수민족들 꼴보기도 싫은데 "[[빨갱이]]"라는 좋은 명분이 생긴 그리스 정부군은 인정사정 볼 거 없이 소수민족 거주지역들을 초토화시켰고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유고슬라비아나 알바니아 및 불가리아로 도망쳤다. 그리고 내전이 끝난 후 그리스에 남은 소수민족들은 "공산당 부역자"라는 혐의로 더욱 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1981년의 사면령 당시에도 그리스 정부는 귀국 허용 대상을 "그리스인 혈통"으로 한정하고 비그리스계 소수민족들의 귀향은 불허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